사울의 아들(2016) – 정확한 것이 없다

사울의 아들(son of saul)

사울의아들

초점이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자.

‘흐릿하다’ 형체는 보이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정확한 것이 없다. 초점이 없다가 갑작스럽게 초점이 맞춰지면 그 정확성의 효과가 배가된다. 사울의 첫 등장이 그랬다. 관객의 주의를 흩트려놓고 사울에게 순식간에 집중시켰다. 그 어느 것 하나 정확한 것이 없다가 사울이란 인물에 집중하게 된다.  이 영화는 어느 것 하나 정확함이 없다. 모든 것이 애매하다. 사울이 사는 세계에는 믿음, 동료, 진실, 그리고 거짓까지도 불분명하다. 여기에 정신없이 몰아치는 이미지들과 영화적 순간들은 숨 쉴 틈을 주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인물들의 전신이 나온 장면이 몇이나 될까. 타이트하게 또 빠르게 관객을 휘어잡는다. 4:3의 화면비로 말이다. 이 얼마나 숨 막히는 연출인가. 게다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롱테이크는 수용소를 보다 현실감 있게 스크린으로 이동시킨다. 사울의 몸에 집중된 화면 옆으로 초점 없는 시신들이 즐비한 가운데 노동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그들의 분노를 보여주는 매개체다. 완벽한 미장센과 배우들의 움직임은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조차 정확하지 않게 만든다. 순간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었다 싶은거다. 감독은 사울에게 관객을 집중시킴과 동시에 사울에게 부여된 목표인 ‘아들의 시신을 묻어준다는 것’에 동참시킨다. 대신 기도문을 낭독해주고 싶을 만큼, 그는 단호하고 매섭게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눈빛은 변함이 없고 심지어 말 수도 적다. 사울은 아들의 시신은 잘 감추어두지만 타인의 시신은 남들과 똑같이 처리한다. 죽음 앞에서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는 사울을 통해 우린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존엄과 생명의 존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사울은 죽음에 익숙한 인물일 수밖에 없다. 그의 직업인 존더코만더. 그들은 본인들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걱정과 염려를 하고 있지만 동시에 타인의 죽음에 침묵해야 하고 타인의 시신을 말 없이 처리해야 한다. 시신이 아닌 토막이라 부르면서 말이다. 죽음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감히 홀로코스트 앞에서 죽음을 논하지 못하겠다. 존더코만더들의 가족이었던, 친구였던 그러나 죽음 앞에선 달리 방도가 없던 그들에게도 정죄할 수가 없다. 단, 짚고 가야하는 부분은 존더코만더의 집단성이다. 

존더코만더의 직업의식

존더코만더들은 수 없는 학살을 경험했다. 사람들을 속여 가스 학살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타의적이지만 학살에 동참했다. 그들이 가스실 앞을 막고 서있을 때 입을 다물지 못 했다. 사람들의 비명에 놀람도 있었지만 존더코만더들의 의연함과 익숙함에 놀라버렸다. 그런데 이들이 격하게 반응하는 순간이 영화 뒷부분에 존재한다. 다른 존더코만더들의 학살을 발견했을 때 그들 중 누군가가 소리친다. “대장이 죽었다!” 단 한 번도 목소리 높이지 않던 존더코만더가 소리를 높인다. 동시에 총소리도 높아졌다. 그리고 또 누군가 말했다. “싸워!” 그들은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도망치면서도 죽음을 앞에 두고 총을 쐈다. 그 순간 나는 이 집단성에서 씁쓸함을 느꼈다. 타인의 죽음에 침묵하고 관조하던 이들이 왜 갑자기 맞서 싸웠을까. 물론 다음 차례가 본인들이라는 두려움 그리고 그 상황이 오기 전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의지는 이해된다. 이들의 결합은 내내 부조리와 함께 소리없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연출적으로 앞선 침묵은 투쟁을 극대화 하기 위한 중요한 포인트인 것은 인정해야 한다. 다만 불편함을 느꼈다. 또 함부로 존더코만더를 비난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스스로에게도 비열함도 느꼈다. 내가 그들이었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는 불편함을 감출 길이 없다.

사울에게 정확한 것이 없다.

앞서 이 영화엔 정확한 것이 없다는 말을 했었다. 사실 이 영화의 주제이자 제목인 사울의 아들조차 그 존재가 애매하다. 영화를 다 본 후에야 알게 되지만 사울의 아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이 또한 정확하지 않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우선 사울의 아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관점으로 서술한다. 우선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사울과 그 아들에 대한 정보는 너무도 적게 주어진다. 그렇기에 관객은 화면 속 숨을 몰아쉬던 소년이 사울의 아들이라고 믿고 몰입하기 시작한다. 이 영화의 제목이 너무도 정확하게 사울의 아들이기에 말이다. 그런데 중간 지점 즈음 사울의 동료가 이런 말을 한다. “너는 아들이 없어” 처음 이 질문에 사울은 본인의 아들이 맞다고 말한다. 그러나 두 번째 질문에선 애매한 답을 한다. “첫 부인의 아들은 아니에요” 아들의 이름이 무엇이냐는 물음엔 본인의 이름을 말할 뿐이다. 침묵도 여러 번이다. 이상함을 느낀다. 그렇게 열심히 랍비를 찾아다니고 죽음의 문턱까지 가면서까지 아들의 장례를 치러주기 위한 준비를 하지만 그는 아들에 대해 아는 게 너무도 적다. 사울의 아들이 없었다는 것은 영화의 엔딩 신에서 사울이 낯선 아이를 보고 환하게 웃는데서 확신했다. 그는 작은 키에 노란 머리의 소년을 보면 모두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문득 앞서 의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비슷한 키에 노란 머리 소년을 데려와” 사울은 낯선 소년을 보며 아들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처음의 목표와 같이 아들을 대신할 시체를 찾았다고 생각했을까. 아제서야 드는 의문이다.

정확성의 딜레마

사울이 수용소에서 생활한지 4개월 되었다고 대사를 통해 관객에게 알려준다. 그리고 또 다른 대화를 통해 사울이 수용 초기와 많이 달라졌음을 알려준다. 관객이 볼 수 없는 과거에 주인공의 변화는 영화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나는 이 부분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울은 죽음을 준비하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러면서 동시에 살아야 하는 의미를 찾고 있던 것 같다. 다른 말로 희망을 잡고 있었다. 삶의 의미가 없던 사울의 삶에 아들의 시신이 나타난 건 사울에겐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목적 없는 삶에 목적이 생기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희망적으로 보고 싶은 내 개인적 바람이 투사된 해석임을 인정한다. 그래서 다소 불편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 어느 것도 정확하지 않는 곳에서 사울은 점점 초점을 잃어갔고, 소년에게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닐까. 사울은 열심히 했다. 비록 아들의 시신을 묻어주는데 실패하고, 랍비를 찾는데도 실패하지만 그는 최선을 다했다. 죽음을 불사하고 아들을 위해 뛰어다녔다. 그 어느 것 하나 정확하지 않은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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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필자가 2016년에 작성했던 내용을 가져와 약간의 수정을 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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